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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역사 #4 : 로마의 통치

by 부스터온 2022. 9. 22.

 

4. 로마의 통치

폼페이우스에서 유대 전쟁까지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유대 왕국은 하스모니안 가문의 지도 하에서 다시 한번 발전할 수 있었다. 로마가 막강해지자 이러한 권력의 공백은 유대 민족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대두되었다.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에 등장한 폼페이우스(Pompejus)는 이방인의 몸으로 성전 구역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성소까지 들어갔다. 지성소는 제의적인 정화와 희생제물을 봉헌한 이후,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폼페이우스는 이러한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성전 구역에서 행한 그의 행동은 유대인에게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서 벌어진 사건을 상기시켰다. 유대 왕국은 멸망했고, 유대의 영토 중 상당 부분이 잘려나갔다. 유대인은 단지 내적으로만 저항심을 품은 채 이러한 조처를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유대인이 끊임없이 로마에 봉기하게 된 이유는 이미 로마인과 유대인의 신성모독적인 첫 대면 때문이었다. 기원전 54년에 크라수스가 또다시 유대인의 재물을 노략하려고 심지어 성전 보물에까지 손을 댔을 때, 유대인과 로마 점령자 사이에서 곧바로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케사르는 정복당한 속주들을 무분별하게 약탈하는 정책을 중단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암살당한 이후 그동안에 시리아와 유대 지역의 통치자가 된 카시우스는 상황을 점점 더 악화시켰다. 돈을 내지 않는 사람은 노예가 되었다. 로마인에 대한 증오는 증대되었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예언에 매달렸고, 이방인인 로마인을 그 땅에서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를 세울 메시아의 도래를 열렬히 희망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듯이 유대인은 세례 요한에게 그가 백성들이 고대하던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인지를 물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 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 많은 유대인은 주목을 끄는 동시대인에 대하여 희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우리를 돕고 구원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가?

 

반 유대인인 헤롯 대왕은 로마의 도움을 얻어 권좌에 올랐고, 그는 오랜 통치기간 동안 계속해서 로마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로마로부터 왕의 지위를 얻었고, 오직 자신의 왕권을 잃지 않기 위해 로마의 모든 착취를 허용했다. 그는 헬레니즘 문화를 장려했고, 원형극장과 체육관, 도시(가이사랴)를 건축했으며 또한 그는 내면적으로 헬레니즘 신봉자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개축했지만 동시에 사마리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해 신전을 건립했다. 헤롯은 매우 영리해서 바리새인과 싸우지 않았고, 오히려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바리새인의 입장을 수용했다. 이처럼 바리새인의 영향 하에 있는 백성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렸다. 헤롯은 백성에게 환영받지 못하였고 로마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는데, 그는 실제로 로마의 앞잡이였다.

 

그가 죽은 이후에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는데, 한 아들(헤롯 안티파스)은 기원후 39년까지 통치했다. 기원후 39년에 설립된 로마의 속주 유대의 행정은 총독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가이사랴에서 자신의 속주를 통치했다. 예를 들어 축제와 같이 필수적인 상화에서만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반역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종교 및 정치적으로 다신론자인 로마인은 유대인의 종교적 감성을 존중하는 일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무렵 황제로 등극한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한 세금 징수는 로마에 대한 증오에 또다시 불을 질렀다. 더욱이 사람들은 세금으로 이방의 점령 세력을 후원했고 그리고 오직 한 사람 즉 그들의 황제를 신격화하는 이방인에게도 자금을 제공했다. 이것은 한 분이시고 참된 하나님을 믿었던 유대인에게는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그에 상응하는 증오가 세금관리자(세리)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점령자를 위해 조세를 징수하는 사람들로 사실상 점령자의 도우미였다.

 

유대전쟁(기원후 63-73년)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를 강행했을 때, 바리새인 사둑(Sadduk)은 봉기를 호소했다. 셀롯인(Zeloten=열심당원)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의 우두머리는 갈릴리 사람 유다였다. 그들은 율법과 하나님의 뜻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을 완전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인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주도 섬기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려고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만을 주로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경우에 따라 무력을 동원하여 대항했다. 그들은 이방의 주 즉 이교도를 그 땅에서 몰아내고 그 땅을 정결케 하는 것을 하나님의 요구이자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통행하기 어려운 지역(사막)에 살았고 매복하여 로마인을 공격하였다. 그들 중 한 특별한 무리는 시카리(Sikarier=단도를 사용하는 암살자)였는데, 이들은 로마인에게 협력하거나 로마인에게 대항하지 않는 이들에게 은밀하게 칼을 들이댔다.

 

셀롯인의 우두머리는 자신을 메시아(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인물)로 이해하거나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메시아 및 왕은 많았다. 로마인은 메시아나 그 추종자를 붙잡았으며 그들을 간단하게 제거했다(십자가형). 예수도 유대인에 의해 로마인에게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부당한 혐의를 받았고, 이 때문에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의 적대자는 그를 제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형법적인 의미에서 로마인이 예수를 죽일 만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셀롯인은 정치적으로 근시안적이고 종교적으로 열광주의자였다. 결국 로마인의 실제적인 능력을 감지하지 못한 채, 그들의 마지막 대표자는 정상이 평평하게 요새화된 마사다 산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은 마사다가 정복되기 직전 로마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집단 자살을 감행했다.

 

비양심적인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의 착취가 유대인의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자 유대 백성은 반란을 일으켰다. '메시아' 므나헴은 자신의 추종자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반란의 첫 번째 지도자가 되었다. 셀롯인 간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미 이전부터이건 또는 그때부터이건 간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은 그 도시를 떠나 요단 계곡에 위치한 펠라(Pella)에 정착했다.

 

네로가 기원후 68년에 자살한 이후에, 베스파시안이 로마에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티투스(Titus)를 예루살렘에 파견했다. 티투스는 그 도시를 포위공격하고, 성 안으로 진입한 이후에 체포된 사람들을 처형했다. 성전은 불에 휩싸였고 완전히 불타버렸다. 두 명의 메시아적 유대인 지도자인 기샬라의 요한과 기오라의 아들 시몬은 일곱 가지를 가진 등대(메노라)와 함께 로마로 압송되었고, 개선행렬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일곱 가지를 가진 등대로 묘사되는 로마의 티투스의 개선문은 오늘날까지도 기원후 70년 로마의 승리를 기억하게 해준다. 예루살렘의 성곽과 요새, 예를 들어 쿰란의 수도원 시설도 파괴되었다. 로마인이 성전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성전세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살아남은 유대인이 이때부터 고정된 액수의 세금을 로마의 주피터 카피톨리눗에게 바치게 되었다는 주장은 전설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유대 전쟁의 종결은 성전과 대제사장직 그리고 유대의 제사장직의 폐지를 의미했다. 또한 '최고 의회'의 존재도 폐지되었다.

 

기원후 100년경에 얌니아(Jamnia)에서 새로운 장로 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이후로 이 의회가 유대교를 이끌었다. 유대교의 최고 지도 기관인 얌니아 회의는 유대교의 '거룩한 문서'(구약성경)로 규정될 수 있는 권위적인 문서를 확정했다. 예를 들어 이때 수많은 묵시문학서가 제거되었다.

 

바르 코흐바 반란(기원후 132-135년)

바르 코흐바 반란은 이곳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메시아적 희망의 마지막 불꽃을 의미했다. 이 반란은 예루살렘에 주피터 신전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도시를 건축하려는 로마 황제의 계획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가장 거룩한 영역에 대한 침해가 또다시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시몬 바르 코흐바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은 초창기 성공적인 발란을 지도했다. 그들은 주권 획득의 상징으로 고유한 주화를 발행했다. 또한 그들은 게릴라식 전법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로마인을 상당히 괴롭게 했다. 로마인은 의용군을 체계적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의용군의 은신처를 찾아내서 불을 지르거나 굶어죽게 만들었다. 유대 지역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았다. 많은 유대인이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유대인에게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은 '카르도 막시무스'와 이교도의 신전을 보유한 로마의 도시로 변했다. 예루살렘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어, '콜라니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불렸다. 주피터 카피톨리누스에게 봉헌된 신전은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거주가 금지되었다. 기원후 4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대인은 다시 그 도시로 들어가서 헤롯 성전의 남아 있는 성벽(통곡의 벽)에서 하나님께 탄식의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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