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헬레니즘) 통치 시기
역사적 사건
기원전 333년에 알렉산더 대왕은 잇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고 난 후, 페르시아의 후계자로 등장했다. 유대인에게 처음에는 이것이 새로운 지배 집단에 의한 통치를 의미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것은 새로운 권력과 더불어 새로운 사상과 철학 그리고 종교적인 사상 자료가 이스라엘로 유입되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신앙인은 그것과 맞서 투쟁해야 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은 불과 3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국의 권력을 얻기 위하여 네 명의 후계자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대제국은 세 개의 독립 국가로 분할되었다.
- 안티고노스(Antigonos)가 다스리는 마케도니아(안티고노스 왕국)
-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가 통치하는 이집트(프톨레미 왕국)
- 셀류코스(Seleukos)가 지배하는 소아시아(셀류코스 왕국)
기원전 220년에 이스라엘은 프톨레미 왕국에 속해 있었고, 약 100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당시 사람들은 안정된 삶을 누렸다.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정치 행정구역이었고, 종교적인 독립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하여 지도력을 행사했다. 산헤드린(지도급의 율법학자, 최고위층 제사장과 존경받는 장로로 구성된 의회)은 대제사장을 후원했다.
이 시기에 유대교는 상당수가 디아스포라(이스라엘 밖으로 흩어진 상태)로 확산되었고, 이들은 소아시아, 스파르타 그리고 이집트까지 이르렀다. 특별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디아스포라의 정신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그리스로 번역되었다(Septuaginta, 70인역).
이 시대의 정신적 상황
페르시아는 대제국의 개별 행정지구가 최소한 특정 사항만을 준수해도 그들에게 자치권을 허락할 정도로 존중했고, 심지어 때로는 그 지역만의 고유한 종교와 신앙적 신념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로 말미암아 헬레니즘의 영향 가운데 혼합종교적인 현상이 발생했고, 서양의 신들과 동양의 신들이 서로 비슷해지거나 서로 동일하게 간주되기도 했다. 그리스어와 그리스적 사상, 그리스 교육과 그리스의 생활양식을 추구했고, 이는 온 세상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번영과 출세를 원하는 사람은 헬리니즘에 자신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스어에도 능숙해야 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도 일반적인 일이었다. 유대인의 세계에서 그리스어는 전반적으로 공용어가 되었다. 이 때문에 구약성경을 그리스어(70인역)로 번역할 필요가 생겼다. 이로써 그리스어만을 사용하는 이들도 역시 성경의 사상을 그리스어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헬레니즘의 스토아 철학은 유대교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토빗서, 유딧서, 욥기, 전도서와 예수 시락서와 같은 신구약성경 중간기의 문서도 헬레니즘 사상에 영향(가령 지혜에 대한 추구)을 받았다. 유대교의 신앙 및 사상과 이질적인 헬레니즘을 아무리 부정할지라도 상당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이교도가 체육관에서 호머를 공부하면서 배운 파이데이아를 통해서 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와 보다 높은 사회적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처럼, 유대인은 토라를 공부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그리스 철학자가 철학에 전적으로 몰입한 것처럼 유대교 율법학자는 조상의 문헌을 공부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스 철학자를 추종하는 제자 무리가 있던 것과 같이, 배움을 열망하는 소년은 율법학자를 추종했다. 내적인 의미에서 회당이 성전을 능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을 능가하는 율법학자 계층이 등장했는데, 이는 단지 디아스포라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예수와 신약성경 시대의 상황
다음에 나오는 프리드리히의 상세한 성명은 헬레니즘이 유대인의 생활에 미쳤던 영향을 구체적으로 인상 깊게 전달해준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주변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된 섬 같은 곳은 결코 아니었다. 발굴품과 발굴된 화폐가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알렉산더 대왕 이전 시대에도 이미 그리스와 팔레스타인은 교역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성립된 이후,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소유하는 민족의 구별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되었다. 유대교 역시 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제논 파피루스는 기원전 250년경에 유대교의 귀족 계층이 이미 그리스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대교의 헬라화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 치아(기원전 170년경)에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때 예루살렘은 일종의 그리스의 폴리스(도시)였다. 예루살렘의 주민은 안디옥 주민이라는 칭호와 시민권을 얻었고, 예루살렘에는 체육관이 건립되었다. 유다의 청소년은 체육관에서 그리스식 의복을 입고, 다음에는 벌거벗은 채로 스포츠 활동을 했다. 제사장은 체육관의 놀이를 관람하기 위해 성전 예배를 버렸다. 토라는 스포츠를 금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육관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은 전통 종교의 위반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제육관과 함께 예루살렘에 그리스 학교가 설립된 것은 명백하다. 마카베오 가문도 이러한 현상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기원전 2세기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진지하게 스파르타 사람들을 유대인의 친척으로 생각했다. 대제사장인 야손이 추방되자, 그는 스파르타로 가서, "종족관계를 통해 그곳에서 보호받기를 희망했다". 대제사장 요나단은 "우리를 너희와 결합시키는 형제애와 우정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스파르타에 있는 '형제들'을 찾아갔다. 마카베오서의 저자는 스파르타 왕이 보낸 편지에 대해 보고한다. 스파르타 왕은 스파르타인과 유대인이 관련된 문서에서 "그들이 형제이고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유래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유대인에게 통보한다. 이처럼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헤롯(Herodes) 치하에서 헬레니즘은 보다 폭넓게 유대인 계층 속으로 침투되었다. 예루살렘 왕은 정치적인 이유로 유대인을 위해 여러 면에서 전심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유대인보다 그리스인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헬레니즘적인 고문관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리스 작가인 다메섹의 니콜라우스는 그의 오른손 역할을 했다. 헤롯은 자신의 아들들을 해외에서 양육했다. 헤롯은 헬레니즘 문화를 장려했다. 그는 여러 곳에 극장을 건립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극장 하나와 원형 극장 하나를 건립했다. 이 극장에서는 운동 경기와 음악 연주, 마차 경기와 짐승의 격투 같은 네 종류의 놀이가 모두 실행되었다. 이와 관련된 운동선수와 숙련자를 나라 밖에서 불러들였고, 이 놀이는 로마 황제의 영예를 위해 4년마다 개최되었다. 극장에서는 유대인의 작품이 아닌 그리스인의 작품이 상연되었다. 이 놀이가 시행될 때마다 많은 외국 방문객이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유대인은 극장을 부정했지만, 그렇다고 이방인만 극장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극장은 오직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도 있었다. 디베랴(Tiberias)에도 경기장이 있었고, 가이사랴(Casarea)는 올림픽을 대체하여 5년마다 격투 경기를 개최했다. 외국인의 팔레스타인 방문은 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수도일 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수도이기도 했다. 큰 절기마다 성전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타국에 살면서 모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리거나 거의 잊어버린 유대인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 이외에도 할례를 통해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과 헬리니즘화한 비그리스도인도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았다. 유일신론(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매력을 느낀 또 다른 비유대인도 기도를 드리려고 성전을 방문했다.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와서 성지에 매장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 많아지면서 이제 아람어를 배우는 것은 시대적으로 불필요하게 여겼다. 예루살렘에서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적인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회당을 세우고 거기서는 그리스어로 예배를 드렸다.
그리스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교육을 받은 사람과 대도시 거주자뿐만 아니라 작은 도시와 마을의 주민도 그리스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십중팔구 팔레스타인의 적잖은 사람들이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갈릴리에도 그리스 문화와 언어를 가진 이방인의 도시가 존재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도시와 무역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일반적인 공용어(그리스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스모니안 왕가는 그들의 동전에 그리스어와 함께 히브리어 문구를 새겨 넣은 반면, 헤롯 가문과 로마가 발행한 동전은 줄곧 그리스어 명문만을 새기고 있었다. 세금으로 사용되는 동전에 대한 이야기에서 예수는 동전의 문구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시는데, 이때 예수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어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말씀하셨다.
유대인 가정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이미 그리스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현상은 대제사장인 야손과 메넬라오스, 하스모니안 왕족(유다의 왕족)에 속하는 아리스토불로스와 안티고노스, 헤롯 가문에 속하는 헤롯과 아르켈라오스, 빌립, 안티파스, 아그립바 등 그리스에 동조하는 상류층만이 아니라 하층민에게도 나타난 현상이다. 예수의 두 제자, 안드레와 빌립도 그리스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랍비주의는 육체와 영혼을 구별했고, 이를 통해 고대 히브리인은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구별이 생겼다. 당시에는 랍비도 육체는 세상적인 것이고 영혼은 하늘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헬레니즘만이 유대교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사상 역시 헬리니즘에 영향을 미쳤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은 유대인이다. 그는 22살에 아테네로 갔다. 그는 자신의 유대적 가르침을 그리스적으로 포장해서 제공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이방적 요소로 간주했다.
그리스적인 요소가 유대교에 미친 영향도 있었지만, 유대교는 전승된 율법을 고수함으로 유대교만의 독자성을 보존했다. 유대교는 헬레니즘과 융화되지 않았다.
위의 실제적인 서술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기가 유대인의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새로운 반응이 발생하게 된 실제적으로 매우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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