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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역사 #2 :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

by 부스터온 2022. 9. 22.

2.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

안티쿠오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교의 박멸을 시도한다.

기원전 200년 유대인의 지배층은 셀류코스 왕조였다. 로마는 기원전 202년에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그때부터 동쪽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로마가 없었다면 더 이상 그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톨레미 왕국(이집트)은 로마와 동맹을 맺고 셀류코스 왕국을 공격했다. 셀류코스 왕조는 막대한 규모의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로써 셀류코스 왕조는 예루살렘의 성전 보물에 손을 대었고, 이것은 모든 경건한 유대인을 분노로 몰아넣었다. 이뿐 아니라 셀류코스 왕조는 대제사장직의 임명에도 개입하여 사독 가문의 혈통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대제사장으로 위임했다(반면 율법은 사독 가문의 혈통을 요구한다). 이것은 신성을 더럽히는 행위, 즉 신성모독으로 간주됐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와해되어 가는 셀류코스 왕국을 헬레니즘의 도움으로 결속시키려 했고, 이를 위해 모든 그리스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거나 또는 폭력적으로 관철시켰다. 기원전 175년 예루살렘에 체육관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비사독계 출신인 메넬라오스(Menelaos)가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헬레니즘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신을 신으로 이해한 이방인 안티오쿠스 4세는 성전 보물을 갈취했을 뿐 아니라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유례없는 신성모독 행위였다. 이방인은 기껏해야 성전 앞마당에나 겨우 들어올 수 있었으며 또한 벽을 통해서 유대인과 분리되어야 했다. 안티오쿠스는 완고한 유대인의 신앙을 파괴하려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벽을 파괴했으며 최악의 신성모독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 올림피오스에게 봉헌했다. 그는 이방신에게 제물을 드릴 목적으로 제단의 상부구조를 신축했다. 이러한 행동은 '다니엘'과 '마카베오 상'에서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으로 언급되었다. 예루살렘의 많은 주민이 저항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다. 대규모로 종교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휴대에 로마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박해할 때, 세부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 선행적인 모델이 되었다. 할례를 행하는 것,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사형으로 처벌되었다. 유대교 신앙은 말살되어야 했다. 셀류코스 왕국을 내적으로 견고케 하며 사람들을 결속시키기 위해서 유대인의 신앙적 공간은 그리스의 신앙과 정신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사건은 셀류코스 왕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졌다. 요컨대 유대인의 신앙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손상되고 침해를 입게 되자 무력적 반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마카베오 전쟁

제사장 가문에 속한 맛다디아(Matthatias)와 기의 다섯 아들이 반란을 지휘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자와 결탁한 동조자를 괴롭혔으며, 이교도의 제의 장소를 파괴했고, 또다시 아이들에게 할례를 시행했다. 맛다디아 사후 유다 마카베우스 시대에 그 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 사건에 대해 보고하는 두 개의 마카베오서의 이름은 마카베우스를 따라 명명된 것이다. 유다 마카베우스는 상당한 추종자를 거느렸고, 군사적 우위에 있는 적을 현저하게 기적적으로 격파했다. 마카베우스의 승리는 그의 추종자와 백성이 이교도의 점령군과 싸우는 전쟁에 하나님이 스스로 개입하시면서 그 전쟁을 주도하신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했다. 기원전 164년에 유다는 예루살렘을 성공적으로 탈환하여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제거하고 성전을 정화하여 성전봉헌 축제(하누카 절기)를 지키게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예루살렘 땅의 무력한 주민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던 기간에 가나안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이 당시에도 유대인은 셀류코스 왕국의 지배를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유대인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160년에 유다 마카베우스는 안티오쿠스 4세의 후계자인 데메트리우스(Demetrius)의 엄청난 역습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어째 그 영웅,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쓰러졌는가"라며 크게 조가를 부르면서 유다 마카베우스의 죽음을 애통하였다.

 

 

하스모니안 왕국

유대인에게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허용되었고, 그와 함께 이전의 마카베우스 가문의 추종자 중 많은 이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유다의 형제 요나단의 지도 하에 광야로 피신해서 그곳에서 다시 게릴라전을 벌였다.

 

요나단은 셀류코스 왕국의 왕권을 쟁탈하려는 데메트리우스와 알렉산더 발라스의 대결을 유대인에게 유리하도록 교묘하게 이용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요나단에게 예루살렘 옆의 믹마스에 거주하도록 허락했다.(옛적에 사울은 이곳에서 블레셋을 격퇴했다) 이곳에서 요나단은 그 옛날의 이스라엘 사사처럼 활동했다. "그리소 요나단이 믹마스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서 그는 백성에게 재판하고 이스라엘에서 악인들을 제거했다"(마카베오 상 9:73). 아마도 요나단은 사사 시대와 사상적 연관성을 만들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또한 그의 동시대인도 그를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다. 사사 시대 이후로 사울과 다윗 치하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너무나 짧은 시간에 다시 수립되었다. 왕을 정점으로 하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새로운 유대인 나라가 등장했다. 다윗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메시아에 대한 예언자의 약속이 실현 된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상승과 그 시대의 사건은 큰 희망과 결부되어 있었다.

 

요나단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왕 즉 데메트리우스와 알렉산더 발라스로부터 그 왕국의 세계적인 주권과 대제사장직의 영적인 주권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로써 또다시 일종의 신성모독이 발생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대제사장은 사독 계열 출신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세네파(쿰란의 사람들)는 스스로 분리되어 광야에 제사장적 및 수도원적 공동체를 세우고 자신을 참된 이스라엘로 이해했다. 요나단과 그의 후계자의 치하에서 새로운 유다 왕국의 독립과 영토는 확장되었다. 알렉산더 얀나이의 치하에서 나라는 다윗 왕국에 비견될 만큼 외적으로 확장되었다. 종말 시대, 메시아 시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옛 예언자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희망은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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