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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역사 #3 :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이 형성되다.

by 부스터온 2022. 9. 22.

 

3.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이 형성되다.

사두개인 : 제사장 사독과 관련이 있다.

사두개인은 예루살렘의 귀족 계급의 제사장이었다. 그들은 특징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속에 그리고 제의 속에 현존한다는 것이다. 사두개인은 진보적인 바리새인과는 달리 율법의 문자적인 해석을 고수했고, 오직 구약성경의 문헌, 즉 토라와 구약성경의 교훈만을 유효한 것으로 여겼다(사두개인의 신념에 따르면, 구약성경의 문헌과 견줄 만큼 권위 있는 구전 전승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도 헬레니즘적인 정신세계에 그들이 동화되어 가는 것을 차단하지는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두개인은 헬레니즘을 거부한 폭넓은 계층의 주민과 소원해졌다.

 

 

하시딤(=경건한 자)

하시딤은 안티오쿠스 4세가 헬레니즘적 종교정책을 억압적으로 자행하고, 유대 종교를 금지하던 시대에 형성된 종교 집단이다. 이들은 헬레니즘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엄격하게 거부했다. 이들은 셀류코스 왕조가 종교 박해를 감행할 때 근절된 무리이다. 그러나 새로운 집단이 하시딤에서 출현하였다. 

 

 

묵시주의자

이들은 그 뿌리를 하시딤에 두고 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벌어진 사건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종교행위가 사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신앙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 모든 상황은 묵시주의자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게 했다. 세상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구원이 발생하지 않으며 오직 세계사의 종말 즉 죽은 자들이 부활한 이후에만 구원이 발생한다. 묵시주의자는 이 땅의 세계사를 시대별로 구분했다. 그들에게 세계역사는 점증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재앙의 역사였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 시대를 종말의 시기로 인식했다. 하나님은 곧 '새로운 시대'를 여실 것이다. 현재에 대한 이러한 평가로 묵시주의자는 격려와 위로를 주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겪는 고난과 박해는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다. 사실 현재는 문제투성이며 유해할 수 밖에 없지만, '마지막 때'로서 재앙의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며, '악한 세계'를 곧 멸망시킬 준비를 하실 것이다.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에 속한다. 이는 묵시문학적 사고를 전제하면서, 마카베우스 가문의 해방 전쟁을 단지 '작은 도움'으로만 이해한다. 묵시주의자는 하나님이 여시는 전혀 새로운 미래만을 진정한 구원으로 기대한다. 바리새적인 사고를 가진 랍지는 묵시문학적 사고를 이상하고 낯선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바룩의 묵시록, 제4에스라서, 아브라함의 묵시록, 모세의 묵시록, 엘리야의 묵시록과 같은 묵시적 문학서는 유대교 성경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묵시주의자는 자신의 작품을 종종 '과거의 위인'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차용하여 사용했다. '묵사'(Apokalyptik)라는 명칭은 신약성경과 관련이 있으며,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은 '묵시록'(Apokalypse=계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에세네 사람(쿰란 사람)

에세네 사람도 하시딤에서 유래했다. 아마도 이들은 쿰란 공동체와 동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쿰란 공동체의 문서는 1947년에 사해 근처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에세네 사람은 사상적으로 제사장적인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며 율법에 충실한 면도 보여주면서 또한 많은 면에서 묵시적인 특징도 보인다.

 

이 집단이 하나님의 백성 중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된 이유는 하스모니안 가문(즉 비사독계 가문 출신)의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사건 때문이다. 에세네 사람에게서 이 사건은 성전을 다시 한번 더럽히는 신성모독을 의미했다. 이들은 자신을 진실하게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며, 거짓과 어둠의 지배에 대한 전쟁에서의 '빛의 아들'로 살았다. 

 

이들도 광야에 거주했다. 이전에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광야시대를 하나님 백성의 본질적인 절정기로 해석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은 광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에세네 사람은 예언의 기대를 높이 평가했고, 메시아에 대한 교훈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메시아적 교훈은 이들 무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종말에 임할 구원의 시대에 "그 예언자와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다. 종말에 출현하게 될 이 세 명의 구원의 인물에 대한 기대는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명기 18:15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스가랴 4:14에서 두 감람나무는 왕적인 메시아와 제사장적 메시아로 해석된다.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따라서 '그리스도'(=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단어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이름(예수 그리스도)이 나타나지 않는 본문은 어떠한 것이 있으며 또한 그 본문 이면에 왕적, 세상적, 정치적 메시아나 대제사장적 메시아의 표상 중에 어떤 것들이 결부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신약성경에서 항상 질문해야 할 사항이다. 세 부분으로 된 시험이야기에는 아마도 모세와 같은 예언자, 제사장적 메시아, 왕적 메시아의 표상이 배후에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의의 교사'가 쿰란 공동체를 인도했다. 그들은 재산을 공유하면서 수도원 생활을 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매일 목욕 의식을 시행함으로써 순결한 생활을 살기 이해 노력했다.

 

 

바리새인

이 무리의 사람도 하시딤에서 유래했다. 에세네 사람처럼 바리새인도 구별사상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들은 에세네 사람과 같이 공간적으로 자신을 구별하지는 않았으며, 계속해서 동시대인과 함께 생활했다. 바리새인은 히브리어 '페루쉼'(peruschim)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은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수도적 성향의 바리새파는 약 기원전 140-130년 사이에 존재했다. 그들은 모든 계층의 주민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제사장적 혈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적으로 율법에 집중했고, 율법의 지시를 현실에 철저하게 적용했으며, 완벽하게 율법을 준수했다. 그 당시의 유대교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율법학자의 지위가 존재했으나 모든 율법학자가 바리새인의 규율에 따라 생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지속적인 율법 연구를 통해서 일종의 율법학자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바리새인이 핵심적으로 노력한 것은 율법의 규정과 계명을 준수하며 생활하는 것이었다. 율법을 완벽하게 존중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따라서 바리새인은 자신을 더럽히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에 문제가 될 만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했다. 그들은 이방인을 기피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멸시한 '평범한 사람'과의 교제도 기피했다. 그 이유는 평범한 사람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무조건적으로는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때로 동시대인들에게 매정하게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진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존경을 받았다. 그들의 신념은 점점 더 백성들 가운데 확산되어갔다.

 

다른 것들과 함께 예수가 대항한 바리새인의 특징적인 교훈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의 문서적인 율법과 더불어 이와 동등한 구두로 전승되는 교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구전 전승의 교훈은 모세 시대로부터 유래했다. 구전 전승의 교훈이 구약성경 진술에 과도한 영향을 미칠 위험이 존재했다.

 

바리새인은 진보적이고 현대화된 사람들이며 또한 새로운 사상에도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가르쳤고, 영혼이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견해를 수용했다. 사두개인은 구약성경과는 이질적인 바리새인의 사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그 점에서 사두개인의 공격을 받았다. 

 

바리새인은 이곳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수립될 것이라는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랍비 문헌에서는 예언자, 메시아적인 대제사장, 메시아적 왕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많은 구절이 발견된다. 바리새인에게 나타나는 지극히 특징적인 또 다른 사실이 있다. 전체 이스라엘이 단 하루만 율법을 완전히 준수해도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개시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 역시 바리새인으로 하여금 율법해석과 율법준수에 집착하도록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이 사상은 자신처럼 율법을 준행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사론의 번성과 또한 사탄론의 사상적 확장 역시 바리새인의 특징이다. 그들은 묵시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면에서 묵시주의자와 공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마도 그들은 율법을 정확하게 준수하기만 한다면 현재에도 이미 구원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모든 사람이 그들이 원할 때만이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에 정통한 바리새인인 바울은 후에 죄가 율법의 성취를 가로막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마음대로 율법을 성취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율법에 대한 다양한 부연 설명을 통해서 바리새인은 율법의 성취를 가능케 하려고 노력했다. 안식일 준수에 대한 계명을 그 예로 들면, 이 계명은 특히 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사람이 안식일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경우, 어느 때는 일이 되며 어느 때는 일이 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은 1,000걸음까지는 일이 안 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미 일이 시작되는 것임을 제시해준다. 바리새인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한 번씩 더 드렸는데, 이는 그들이 산 물건의 십일조를 이전에 드렸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무의식적으로도 율법을 범해서는 안 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율법의 개개의 규정에 집착하게 되었고, 더 이상 율법의 핵심적인 관심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율법의 규정은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간의 교제를 유익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했다. 예수는 다음 내용을 핵심적 사상으로 간주하셨다.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똑같이 사랑하라. 이를 통해 사람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백성들에게 정신적으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은 회당 생활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근본적으로 회당 생활을 성전예배로부터 독립시켰다. 기원후 70년에 성전이 다시 최종적으로 로마인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이러한 상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강력한 바리새적 성향의 랍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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