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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형성과 특징 #2 :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by 부스터온 2022. 9. 23.

4. 공관적인 도식(마태-마가-누가)

많은 학자들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약성서학의 연구 결과는 '공관적인 도식'(synoptische Schema)이다. 마가복음이 가장 오래된 복음서이다.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복음서를 저작할 때 마가복음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마가복음 이외에 마태와 누가는 공통적으로 예수의 연설 수집물(Redequelle=Q)을 사용했다. 이밖에도 그들 각각에게만 전승된 예수에 관한 보고와 예수 말씀이 그때그때마다 사용되었다(SMt=마태의 특수자료, SLk=누가의 특수 자료). 예를 들어 누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와 바리새인이나 세리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유일한 복음서 기자이며, 마태는 동방에서 온 세 명의 현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유일한 복음서 기자이다. 

 

누가는 복음서 첫머리에 그 자신이 말씀을 찾아 수집하고 편찬한 최초의 인물이 아님을 밝힌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누가복음 1:1-4)

 

공관적인 도식

 

5. 요한복음

매우 경건하고 깊이가 있는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특수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도 요한은 하나의 공관복음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공관복음서와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이야기와 예수 말씀을 대본으로 사용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요한은 공관복음서 기자가 언급하지 않거나 또는 알지 못하는 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공관복음서 다음으로 나오는 요한복음을 자세히 읽는다면, 요한복음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전에 이러한 사실을 이미 스스로 발견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 기자 요한
짧은 단편적이야기
간략하고 쉬운 내용으로 된 예수 말씀
(산상설교는 이러한 말씀의 모음집)
본량이 많은 이야기
길게 돌려 말하는 연설
인물
바리새인-사두개인-세리-병자-사마리아인-이방인
인물
유대인(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는 사람들)
내용
중심주제 : 하나님의 통치, 하늘나라
내용
(동일한 사실을 전개하면서)
대조적인 쌍에 관한 연설: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
'나는 -이다' 말씀
형식
구두 전승의 모음집
형식
자료가 저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에게 영향을 받음
목적
공관복음서 기자는 우리에게 예수의 활동이 다양하다는 인상을 전달함. 짧은 본문 단락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언함.
목적
요한은 예수의 유일무이한 삶을 해석함.
결과
마태, 마가, 누가는 본질적으로 자신 이전에 존재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증언을 진술했음. 그들은 구성, 통합, 삭제나 약간의 첨가와 변형을 통해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리스도를 선포했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말씀하심.
결과
요한도 이전에 있던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자신의 증언을 진술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기 쉽도록 개인적으로 매우 강하게변형시키고 상세히 설명하고 묵상하고 해석함.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이처럼 말씀하심.

 

6. 복음서는 부활 경험으로 각인된 문서이다.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요점 : 복음서에서 보고된 모든 기록은 거기에 기록된 것과 같이 실제적으로 발생한 사건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즉 기록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보고는 진실하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복음서에 대해 기록된 것과 같이 실제적으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만 '진실'한 것으로 여기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오직 발생된 사건만이 진실하다."는 생각은 진리의 개념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제한하게 된다. 복음서는 결코 예수에 대한 전기가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설교이다. 제자들이 일기로 썼다거나 예수 말씀을 속기로 기록하였는지 여부를 살핀다면, 개별적인 이야기나 개별적인 말씀은 사실적인 보도가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지상 사역을 하는 동안 예수를 전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언을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부활하시고 하나님께로 승천하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 12:16).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이후 제자들은 당황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부활은 그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에 대해 언급한 구약성경의 문헌을 설명하시면서 승천하신 분, 살아 계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그리스도)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이 있으나 지금은 (나의 지생에서의 생애 동안에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이해하고, 부활하신 주님에게 성숙한 신앙으로 인도받게 된 이후에 비로소 설교를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부활의 경험(제자들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현현하신 사건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다, 예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 인간들 가운데 계시며 오늘날에도 그의 영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믿게 된 제자들의 인식과 신앙)이 없었다면, 우리는 복음서가 보고하는 이야기와 사건 그리고 예수 말씀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제자들, 원시 그리스도인, 후대의 그리스도인과 우리는 결코 어떤 훌륭한 인물 즉 짧은 기간 동안 이 땅에서 활동한 너무나도 근사하고 감탄할 만한 사람 또한 그가 선택할 열두 명의 제자로부터 영광을 받았던 인물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그들 이후의 모든 증인은 짧은 기간 동안 이 땅에서 사역하신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인간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주셨고 또한 하나님이 구분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는 세상의 끝날까지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다는 메시지를 선포하려는 것이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 그리고 우리 역시 살아 계신 주님 즉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과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제자들 즉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은 예수에 대해 과거에 경험한 것과 현재 경험하는 것들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자세히 연구하고 새롭게 숙고함으로써 선포의 명령을 실행하였다. 그들은 부활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되었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부활을 통해 새롭게 해석한다. 따라서 복음서의 개별적인 이야기는 모두 부활의 경험으로 각인되었고, 그것들은 더 이상 이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는 전적으로 역사적인 보고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해석 즉 필수 불가결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으며, 부활 이후에야 제자들을 통해 완전히 이해된 예수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한다. 과거의 것과 결부된 이야기는 그때 일어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부활 이후에 보다 더 많은 것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미를 실례적이고 교훈적으로 밝혀주려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마태와 누가에 나타나는 시험 이야기는 마가와는 차이점이 있다. 마가는 시험에 대해서는 단지 짧게 언급할 뿐이고 예수의 파송 그리고 의미와 사역은 간결한 형태로 예술가처럼 세밀하게 전개한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시작 부분은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이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힌다.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 때때로 상징적인 것과 실제로 발생한 일 그리고 교훈적인 것과 비유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진술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 기자가 무엇을 의도하는가?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과 함께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인가?)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대할 때 본래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질문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부활하신 분은 현재 기록된 형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한 복음서의 보도대로 예수가 길가에 있는 두 명의 병자를 고치셨는지, 아니면 다른 복음서의 보도대로 네 명의 병자를 고치셨는지의 여부는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구원'이 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상징으로 그분은 병자를 '치료'하셨다.

 

'역사적인 것'은 나사렛 예수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고려해야 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관점은 결코 아니다. 동시에 복음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복음서의 메시지를 통해 그분은 오늘 우리 곁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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